본문 바로가기
끄적

김고은, 박지현 주연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 상연의 입장에서 써본 리뷰 및 감상평

by GJ88 2025. 11. 2.
반응형

"​내 세상의 유일한 벽, 류은중이라는 거울 앞에서 - 천상연 -"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30여 년에 걸친 두 여성의 우정과 애증을 류은중(김고은)의 시선으로 잔잔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이 휘몰아치는 관계의 파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천상연(박지현)의 세상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은중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상연의 사연을 보여준다. 나는 이 드라마를 상연의 시점에서 다시 보았다. 그러자 은중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한 여자의 처절한 결핍과 생존 투쟁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은중의 상처에 공감했지만, 나는 상연의 비명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그녀에게 류은중은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그녀는 상연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녀가 평생을 넘어서려 했던, 그러나 끝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세상의 유일한 벽이었다.

상연은 모든게 완벽한 소녀였다. 하지만 겉에 갑옷 두르고 그 안에 그림자를 숨기고 있었다.

완벽한 소녀. 그 안의 그림자

​1992년, 천상연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류은중의 세상에 등장한다. 부잣집 딸,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완벽한 소녀. 하지만 그 완벽함은 상연이 아주 어릴 때부터 터득한 생존을 위한 갑옷이었다. 화려하고 값비싼 것들로 채워진 그녀의 집은 안식처가 아닌 쇼윈도였고, 그녀는 그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전시품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그 공허함의 중심에는 엄마, 윤현숙(서정연)이 있었다. 은중에게는 세상 다정한 스승이자 존경의 대상이었겠지만, 상연에게 엄마는 냉담한 평가자였다. 엄마는 늘 상연을 오빠 천상학(김재원)과 비교했고, 딸인 자신이 아닌 딸의 친구 은중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의 제자인 은중을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밥을 차려줄 때, 상연은 그 식탁의 이방인이었다. 은중의 격려가 되어준 그 사람이 상연의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이 잔인한 아이러니가 두 사람 관계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을 '컵'에 비유한다면 은중은 작은 컵이었지만 늘 사랑과 자존감으로 가득 차 넘실거렸다. 상연은 크고 화려한 컵이었지만, 그 안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상연은 은중의 그 충만함을 미치도록 부러워했고, 은중은 아마도 상연의 그 거대함을 동경했을 것이다. 이 근본적인 오해가 30년 비극의 씨앗이었다. 상연이 은중에게 처음 다가간 것은, 엄마가 가장 아끼는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사랑을 간접적으로나마 훔치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치졸한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 은중은 상연에게 친구라는 이름의 전리품과도 같았다. 하지만 은중은 결코 그녀의 소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은중으로 인해 상연의 결핍은 더욱 선명해졌다. 은중은 그렇게, 처음부터 상연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되기 시작했다.

상연에게 있어서 은중은 거대한 벽이자 질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우주가 무너지던 날 : 두 명의 '상학'과 빼앗긴 구원

​상연의 차가운 세상에서 유일한 우주는 오빠, 천상학이었다. 그런 오빠가 상연과 함께 낡은 골목길도 오빠의 라이카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뷰파인더를 처음 은중에게 건냈다. 훗날 사진을 하는 은중의 곁에서, 상연은 그 기억마저 빼앗긴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상연의 인생이 조각난 순간은 오빠의 죽음이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단순한 오빠의 자살이 아니었다. 그녀가 오빠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 안에 담긴 비밀을 엄마에게 이야기 한 그날, 그녀의 우주는 산산조각 났다. 어린 상연은 그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데 왜 반대하는지 이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오빠의 자살이었고, 그녀는 평생을 오빠가 자신 때문에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죄책감의 낙인이 찍혔다. 

​오빠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버지의 사업은 망했고, 부모님은 이혼했으며, 상연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그 잿더미 속에서 그녀는 하나의 동아줄을 발견한다. 바로 김상학(김건우)이라는 이름이었다. 오빠와 같은 이름, 오빠처럼 사진을 사랑하고, 오빠처럼 따뜻했던 사람. 그는 상연에게 단순한 첫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만질 수 있는 유령이었고, 죽어버린 우주를 되살릴 유일한 희망이었다. 상연을 연기한 박지현 배우는 "상연이는 결핍이 있는 친구라, 유년 시절에 느끼지 못한 사랑을 김상학에게 원했던 것 같다. 상학이는 상연이가 살아갈 수 있게끔 동아줄을 내려준 사람"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그 희망의 끝에서 상연을 기다린 것은 또다시 류은중이었다. 은중이 그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것은 단순한 실연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연이 저주받았다는, 그리고 은중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운명이라는 평생의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사랑, 오빠의 카메라, 그리고 이제는 오빠의 유령마저도. 은중은 그렇게 상연과 그녀의 행복 사이에 선, 결코 넘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이 되었다. 상연의 절망과 분노는 빼앗긴 사랑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도둑맞은 구원에 대한 절규였다.

30대의 상연은 밑바닥부터 올라오며 강인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은중에 대한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파랑의 기원'과 텅 빈 승리

​영화판에서 재회했을 때, 30대의 상연은 더 이상 과거의 나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고,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은중과 함께 일하는 모든 순간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하지말았어야 할 선택을 하고만다. 그렇게 그녀는 은중의 시나리오 '청춘멜로'를 훔쳤다. 

이것은 명백히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연의 입장에서 그것은 평생 기울어져 있던 저울을 바로잡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상연의 입장에선 내 엄마를, 내 오빠의 유령을 훔쳐간 너에게 시나리오 하나쯤 빼앗는 것이 과연 그렇게 큰 죄가 아니다라며 스스로 위한삼으며 자신을 정당화 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벌였던 수많은 싸움은 사실 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명의 상학에 대한, 30년 뒤틀린 역사 전체에 대한 싸움이었다.

'청춘멜로'의 바뀐 이름 '파랑의 기원'이라는 제목은 상연에게 너무나 절실했다. 그녀의 삶 자체가 깊고 시린 슬픔, 그 '파랑'의 기원이었으니까. 그 프로젝트를 훔쳐 성공시킴으로써, 그녀는 은중 없이도 자신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고통을 자산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은중을 향한 전쟁 선포이자, 그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픈 절박한 독립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텅 빈 승리였다.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인생의 유일한 비교 대상이자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은중을 잃었다. 10년간의 완벽한 단절. 아이러니하게도 은중을 이기기 위해 저지른 그 행동이 상연을 완벽한 고립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늘 혼자였고, 행복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상연은 결국 은중에 대한 모든 열등감, 질투를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죽음 앞의 항복. 마지막 여행과 비로소 마주한 진실

​10년의 침묵이 흘렀다. 상연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지만, 그 성공을 지켜봐 줄 단 한 사람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고가 내려졌다. 40대에 말기 암. 그녀의 삶에 유통기한이 찍혔다. ​죽음 앞에서 지난 세월의 분노와 경쟁은 먼지처럼 하찮아졌다. 상연은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할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흩어진 가족들은 유령이나 실망의 이름으로만 남아있었고, 일로 만난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의 어지럽고 모순으로 가득 찬 삶 전체를 온전히 목격한 사람. 좋든 싫든 그녀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류은중뿐이었다. 

상연이 은중에게 스위스에서의 조력자살에 동행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것은 그녀 평생에 걸친 항복 선언이었다. 결국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남은 사람은 은중 하나뿐이라는 처절한 고백이었다. 조영민 감독은 "생의 마지막을 함께해달라고 부탁하는 친구는 대체 어떤 이일지 오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건 바로 서로에게 거울이자 그림자이며, 때로는 고통의 방향을 가리킬지언정 유일한 북극성이 되어주는 그런 관계다.

상연의 부탁은 단순히 죽음의 여정을 돌봐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사람 관계의 본질을 확인하려는 그녀의 마지막 시험대였다. 만약 은중이 동행을 수락한다면, 질투와 배신, 증오로 얼룩졌던 두 사람의 관계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깊고 지독한 사랑의 한 형태였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은중의 수락은 상연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의 기회였다. 그리고 은중은 와주었다.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 상연은 은중에게 말한다. "끝내 나를 받아주는구나".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용서보다 더 깊은 차원의 수용. 찬란했던 소녀, 슬픔에 잠긴 동생, 질투에 사로잡힌 친구, 무자비한 경쟁자였던 자신의 모든 모습을, 그 총체를 은중이 온전히 인정해주었다는 의미였다. 그 순간 상연은 깨달았을 것이다. 은중은 결코 벽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연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삶을 재는 척도였다. 이 드라마는 결국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은중이 끝내 상연을 받아줌으로써 상연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와 화해하는 이야기였다. 상연처럼 깊은 결핍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타인에게 비친 내 모습을 통해 나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한다. 은중이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 준 그 행위는, 상연을 평생 옭아매던 자기혐오로부터 벗어나 평온 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살게 해주는 최고의 선물이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올해 본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였다.

"개인 평점 8.0점/10.0점. 내 세상의 유일한 벽이었던 너, 그 앞에서 비로소 완성된 나의 이야기."

​<은중과 상연>은 은중의 시선으로 전개되지만, 그 서사의 깊이는 상연의 입장을 이해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녀의 모든 악행과 비뚤어진 욕망은 결국 '결핍'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그녀는 평생을 은중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벽이 있었기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사랑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묻는다. 사랑은 꼭 따뜻해야만 할까. 상처를 남기는 사랑도 여전히 사랑일 수 있을까. <은중과 상연>은 그에 대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한다. 사람이 사람을 깊게 사랑할 때, 그 감정은 늘 복잡하지만 진짜라고. 상연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평생을 허물고 싶었던 그 벽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기댈 수 있었던 단단한 기둥이 되어주었으니까. 그 마지막 구원과 평화를 위해, 이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8점을 주고 싶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