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쇼츠에 이끌려 시작한 정주행. 뉴트로 감성을 자극했지만 아쉬웠던 드라마"

이 드라마와의 첫 만남은 전적으로 알고리즘의 공이었다.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를 넘기던 중, 1980년대의 강렬한 색채와 '안내양'이라는 낯설지만 매력적인 소재의 클립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김다미와 신예은이라는, 현시대 가장 주목받는 두 배우가 푸른색 안내양 유니폼을 입고 기숙사에서 동고동락하는 모습은 , 그 자체로 강력한 '뉴트로(Newtro)'의 유혹이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이끌렸던 것은 단순히 복고풍의 이미지만은 아니었다. 1980년대 두 주인공이 치열한 노동의 현장에서 틔워낼 끈끈한 연대와 우정의 서사와 여러 주변인물들의 설정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매력에 끌려 결국 나는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 기어코 티빙 이용권을 결제하고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정주행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초반의 강력했던 몰입감은 안내양 시절인 1부가 끝나며 급격히 식어갔다. 이 드라마를 보며 느낀점을 한자씩 써내려 가보고자 한다.

1부와 2부의 극명했던 온도차
내가 느낀 가장 큰 감정의 낙차는 드라마가 1부와 2부로 나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영례(김다미)와 종희(신예은)의 안내양 시절이던 1부가 끝나고 2부로 넘어가면서 드라마의 집중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100번 버스, 찬란했던 '안내양즈'의 시절
드라마의 1부는 1982년을 배경으로 , 100번 버스 안내양으로 만난 고영례와 서종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회 첫 방송부터 시대의 질감을 촘촘히 재현하며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던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인 고영례는 고된 일과 속에서도 검정고시 공부를 병행하는, 책임감 강한 'K-장녀' 그 자체였다. 반면 서종희는 미스코리아의 꿈을 안고 상경한, 당차고 거침없는 인물이었다. 이 두명은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며, 끈끈한 우정을 싹틔웠다.
그러던 중 두 친구의 운명적 남자, 한재필(허남준)이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1부에서 재필의 마음이 향했던 곳은 명백히 '서종희'였다는 사실이다. 재필은 종희에게 거침없이 직진했고 , 종희 역시 "어떤 모습이라도 괜찮다"는 재필의 말에 마음을 열었다. 당시 영례는 두 사람의 공통된 첫사랑이었던 재필을 그저 바라보며 짝사랑하는 위치에 있었다. 1부의 서사는 이 '재필-종희'의 관계를 매우 밀도 있게 그려냈다.
1부의 클라이맥스는 충격적이었다. 영례가 악랄한 노무과장(박지환)에게 위협받던 순간, 종희가 영례를 구하기 위해 만년필로 노무과장의 어깨를 찌르고 도주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친구를 위해 자신의 꿈, 사랑, 그리고 인생 전부를 버린 종희의 거대하고 숭고한 희생이었다. 1부는 바로 이 숭고한 희생을 정점으로 막을 내렸고, 나는 2부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 숨죽여 기다렸다.
7년의 시간이 뒤바꾼 관계의 무게
하지만 7년 후, 1989년을 배경으로 한 2부 가 시작되자, 나는 엄청난 서사적 배신감과 마주해야 했다. 드라마는 완전히 다른 무대를 펼쳐놓았다. 인물들의 상황은 7년이란 시간만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도망쳤던 종희는 대기업 회장의 수양딸이 되어 나타났고, 부유했던 재필의 집안은 몰락했으며 , 영례는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1부의 핵심이었던 '안내양들의 삶과 우정'이라는, 리얼리티가 가미된 청춘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미스코리아 대회' , '재벌가', 그리고 '뒤엉킨 삼각관계'라는, 한국 드라마에서 수없이 반복된 지극히 통속적인 멜로가 자리 잡았다. 특히, 드라마는 마지막 회(12회)에 이르러 이 모든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려 시도한다. 복수심에 불탄 노무과장이 돌아와 이번엔 미스코리아 진이 된 종희를 위협하고, 1부와는 정반대로 영례가 종희를 대신해 칼에 찔려 코마에 빠진다.
그리고 1년이 지나 기적처럼 깨어난 영례는 종희가 양보한 장학금으로 꿈에 그리던 국문과에 진학하고, 재필에게 프로포즈를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세 사람은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바닷가를 거닌다. 제작진은 1부(종희의 희생)와 2부(영례의 희생)의 대칭 구조를 통해 두 우정의 무게를 맞추려 의도했겠지만, 2부 내내 내가 느낀 실망감을 덮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시청자들이 이 엔딩을 두고 "화해가 아닌 봉합", 심지어 "세 명이 같이 사는 엔딩 같다"고 비판한 의견도 있었는데 이에 나 역시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드라마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잔잔함'과 '편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만이 가진 매력이 보였던 긍정적인 면들도 분명히 있었다. 1부에서 보여준 1 980년대를 그대로 재현해낸 여러 소품들과 세트장, 예를 들면 회수권, 토큰, 주판, 성문영어책, 종이인형 등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나에게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단순복고 아닌 전연령층 즐길 만한 뉴트로 청춘물"이라는 한 기사의 평가처럼 , 초반부의 분위기 조형은 매우 훌륭했다.
또한, 이 드라마의 음악 삽입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자극적인 사운드 대신, 서정적인 음악으로 감정선을 뒷받침했다. 백예린의 'Close To You' (They Long To Be) 가 깔리던 영례와 재필의 첫 만남 , 그리고 여러 상황에 맞게 나온 OST는, 드라마가 가진 '잔잔함'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1부에서 장점(편안함)으로 느꼈던 이 '잔잔한 톤'은, 2부에서는 단점(지루함)으로 작용했다. 2부는 배신, 복수, 사랑 쟁탈, 살인 미수 등 극단적인 멜로의 플롯을 따랐다. 이런 극단적인 사건에는 그에 걸맞은 감정적 폭발이나 역동적인 연출이 필요한데, 드라마는 1부의 '잔잔한 톤'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볼수록 조금은 늘어지는 느낌에 지루한 느낌"을 2부들어서 보는 내내 지울 수 없었다.

남주와 여주의 부족했던 케미 그리고 2부로 옮겨가며 매력을 잃어버린 캐릭터들
제작진은 1부에서 '재필-종희'의 서사를 너무나 밀도 있게 그렸다. 배우 신예은조차 인터뷰에서 이를 "뜨거운 사랑", "어리고 젊었을 때의 사랑" 으로 정의할 정도였다. 시청자들은 이미 이들의 사랑을 '진짜'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했다. 하지만, 7년 후. 재필은 종희의 '절친'인 영례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이는 7년간 친구(영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종희 의 삶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구도였다.
이 때문이었을까? 항상 드라마를 보다보면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케미에 정신을 못차리고 계속 보게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너무 두 사람의 케미와 개연성이 떨어져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로맨스로 남고야 말았다.
거기에 재필은 1부에서 종희에게 '직진'하던 매력적인 인물에서, 2부에선 7년간 영례와 '친구인지 연인인지 모르겠는 관계' 를 유지하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비호감 남주' 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영례의 7년 뒤 모습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종희는 영례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해주고, 영례를 구하기 위한 희생 으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잃었다. 그런 종희가 7년 만에 돌아왔을 때, 영례가 보여준 태도는 재필을 사이에 둔 '견제'였다. 심지어 종희가 재필과 다시 잘해보고 싶다고 하자 "내가 먼저 좋아했다"며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는, 1부에서 보여주었던 영례의 매력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드라마를 한층 더 없어보이게 만들었던 여러가지 대충 만들어진 설정들
분명 1부에서 보여준 종희와 영례의 모습은 끈끈하고 멋진 우정이었다. 그렇게 종희가 도망치고 언젠가 둘이 만나 그 끈끈한 우정을 다시 보여주는 장면들을 기대했지만, 2부에서 그려진 두사람의 모습은 급격하게 대충 넘어간 설명 앞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부호만 남기게 되었다.
1회 만에 종희가 재벌가 수양딸이 되고 재필이 몰락하는 급격한 설정 변경 은 너무나 편의적이었다. 거기에 영례가 갑자기 대학 진학 자금을 위해 미스코리아 출전을 결심하는 전개 는, 하필 종희와 재필 문제로 갈등하던 시점과 맞물려 '종희를 이기기 위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는 영례의 캐릭터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만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1부에서 종희에게 찔려 어깨 한쪽을 못 쓰게 되었다던 노무과장이 2부에서 멀쩡히 경비원으로 잠입하거나 , 11화 내내 가정폭력범이자 범죄자였던 종희의 오빠 종남이 마지막 회에 갑자기 동생을 걱정하는 모습 등, 조연들의 설정마저 스스로 무너뜨리며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개인평점 6점/10점. 편안했지만 아쉬움이 계속 보였던 드라마. 1부의 잠재력을 2부가 지워버린 전형적인 용두사미."
결국 <백번의 추억>은 웰메이드 청춘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엄청난 잠재력(1부)을, 가장 통속적이고 개연성 없는 삼각 멜로(2부)와 맞바꾸는 선택을 한 드라마로 내 기억에 남게 되었다. 시청률은 마지막 회 9.1%로 자체 최고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과정의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다.
내가 준 6점은, 1부가 선사했던 '편안함'과 '잔잔함' , 그리고 김다미와 신예은이라는 두 배우가 붕괴된 서사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내려 애썼던 그 시절 청춘의 감정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하지만 나머지 4점의 공백은, '환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영례와 재필의 공허한 로맨스 , '습자지'처럼 얇아진 우정 , 그리고 '여러 설정들을 대충 넘어가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한 2부에 대한 나의 깊은 아쉬움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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