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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박지훈, 유지태, 유해진 주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감상 후기

by GJ88 2026.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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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기록에 가려졌던 패자의 인간적인 삶, 유해진의 따뜻함과 박지훈의 깊은 눈망울로 스크린에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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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명절 연휴가 되면 극장가는 이른바 '대목'을 노리는 텐트폴 영화들로 붐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작년 설 연휴 극장가를 떠올려보면 아쉬움이 컸다. 명절 특수를 노리고 급하게 짜깁기한 듯한 코미디나, 억지 신파를 버무린 영화들이 주를 이루며 관객들의 피로감을 높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연휴에도 극장을 향하는 발걸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는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상영 중인 영화들 가운데 가족끼리 함께 보기에 이보다 더 괜찮은 선택지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작년 설 개봉작들과 비교하면 감히 '수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이야기의 짜임새나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까지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작품이었다.

​경쟁작이었던 조인성, 박정민 주연의 <휴민트>나 최우식 주연의 <넘버원> 등을 제치고 이 영화가 설 극장가의 최종 승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자극적인 액션이나 억지웃음 대신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와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감동이 관객들의 마음을 제대로 관통한 것이다.

척박한 땅 영월, 쫓겨난 어린 왕과 속물 촌장의 기막힌 동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453년 계유정난 이후,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제6대 국왕 '단종(이홍위)'의 유배 시절을 다룬다.

영화의 시작은 강원도 영월의 척박한 두메산골 '광천골'이다. 마을의 촌장인 엄흥도(유해진 분)는 먹고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든 콩고물을 얻어보려는 심산으로 '유배자 유치 경쟁'에 뛰어든다. 권세 높은 양반이 유배를 오면 그 수발을 들며 마을에 재물이 돌 것이라는 얄팍하지만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유배지를 청령포로 확정 짓고 '대감마님'을 맞이할 꿈에 부풀어 있던 엄흥도.

​그러나 그가 맞이한 인물은 기댈 곳 없는 권력의 희생양, 폐위된 왕 이홍위(박지훈 분)였다. 촌장 엄흥도는 부귀영화는커녕 자칫하면 역풍을 맞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골칫덩어리를 떠안게 된 것이다.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서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하는 엄흥도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채 모든 것에 마음을 닫아버린 어린 폐왕.

​영화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사람, 그리고 투박하지만 정 많은 광천골 마을 사람들이 서서히 심리적 거리를 좁혀가며 인간적인 유대를 쌓아가는 과정을 따뜻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낸다. 동시에 단종의 복위를 위해 순흥에서 군사를 일으키려는 금성대군(이준혁 분)과 이를 피도 눈물도 없이 저지하려는 반정 세력의 실세 한명회(유지태 분)의 숨 막히는 정치 서사가 투트랙으로 교차하며 극의 긴장감을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한다.

이 영화에서 장항준 감독의 연출은 특별하진 않았지만 기본에 충실했기에 그래서 더 깊었다.

특별함보다는 기본에 충실했던, 그래서 더 깊이 스며든 무난함

​장항준 감독의 연출은 솔직히 말해 '파격적'이거나 '특별한 기교'가 돋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이나 실험적인 미장센 대신, 정통 사극 드라마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무난함'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했다.

​연출이 부족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데 있어 연출이 지나치게 튀거나 멋을 부렸다면, 오히려 인물들의 세밀한 감정선이 가려졌을 것이다. 장 감독은 특유의 이야기꾼 기질을 발휘해 투박한 민초들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소소한 웃음(코미디)과, 거대한 권력의 폭력성 앞에 스러져가는 슬픔(비극)의 완급 조절을 탁월하게 해냈다. 자칫 무겁기만 할 수 있는 단종의 비극 속에서 '엄흥도'라는 인물을 통해 숨 쉴 틈과 '웃음'을 찾아낸 상상력은 영리했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음에도 지루할 틈 없이 관객을 극에 몰입하게 만든 것은, 철저히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을 믿고 밀어붙인 뚝심 있는 연출 덕분이었다.

이 영화는 역사적 패자였던 단종을 비추었다.

승자 '수양대군'이 아닌 패자 '단종'을 비추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고, 또 높이 평가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카메라의 시선'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계유정난과 단종 시대를 다룬 사극들(예를 들어 영화 <관상> 등)은 대부분 역사적 승자인 '수양대군(세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피바람을 일으키는 권력자의 카리스마, 야망, 혹은 그 주변 인물들의 두뇌 싸움이 주된 서사였다. 단종은 그저 나약하고 가련하게 희생당하는 '배경'이나 '사건의 명분' 정도로만 소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놀랍게도 <왕과 사는 남자>에는 수양대군이 단 한 장면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거대한 권력을 화면 밖으로 치워버리고, 그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내쫓긴 역사상 패자, 단종(이홍위)의 내면으로 카메라를 깊숙이 밀어 넣는다. 수양대군의 그림자는 극 전반에 짙게 깔려 공포감을 조성하지만, 영화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권력을 빼앗는 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자가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실패한 왕, 나약한 소년."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단종의 이미지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이홍위는 마냥 가련하지 않다. 소박한 밥상에 올라온 나물 반찬에서 자신을 위해 그것을 다듬었을 백성들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릴 줄 아는 성군의 자질이 있었고, 자신을 지켜주려는 광천골 사람들을 위해 짧은 생이나마 결연하게 삶의 의지를 다지는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비록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일지언정, 영화를 보는 내내 "그동안 단편적인 기록에만 남아있던 단종이 실제로는 저렇게 속 깊고 강인한 내면을 가진 소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이 영화를 빛낸건 무엇보다 배우들의 명품 연기였다.

미친 연기력의 박지훈·유지태, 그리고 믿고 보는 유해진

​이 영화가 완성도를 획득할 수 있었던 8할은 배우들의 미친 연기력 덕분이다.

​① 박지훈 (단종/이홍위 역): 스크린을 압도한 깊은 눈망울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이자 충격은 단연 박지훈이다. 드라마 <약한영웅>에서 보여준 연기력도 훌륭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가히 경이로울 정도의 흡입력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공허한 눈빛에서 시작해, 백성들의 삶을 마주하며 서서히 온기를 되찾고, 끝내 거대한 운명 앞에 서글픈 분노를 터뜨리는 감정의 진폭을 그 어린 배우가 완벽하게 통제하며 연기해냈다. 과장된 대사 없이 오로지 눈빛과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 '이홍위'라는 묵직한 캐릭터의 서사를 완성해 낸 그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박지훈이 아닌 다른 단종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② 유지태 (한명회 역): 기존의 틀을 깬 엘리트 관료의 서늘함
수양대군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메인 빌런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다. 우리가 흔히 아는 꾀 많고 야비한 모사꾼 한명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지태는 무능한 왕족을 깔보며,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국가(사실은 자신의 권력)를 위해 움직이는 얼음장 같은 '전형적 엘리트 관료'의 모습으로 한명회를 재해석했다. 큰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위압감과 서늘한 목소리는 등장하는 씬마다 극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며 엄청난 텐션을 유발했다. 유지태의 미친 연기력이 없었다면 영화의 긴장감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③ 유해진 (엄흥도 역): 영화의 숨구멍이자 심장
'믿고 보는 유해진'. 이 수식어는 이번 영화에서도 100% 적중했다. 유해진이 연기한 촌장 엄흥도는 영화 전반부의 팍팍한 분위기를 특유의 소탈하고 인간미 넘치는 코미디로 이완시키며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능청스럽게 이익을 좇는 촌장에서 시작해, 이홍위의 진심을 마주하고 끝내 자신의 목숨(삼족을 멸하는 벌)을 걸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까지의 감정 변화를 유해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먹먹하게 그려냈다. 언제나 평균 이상의 감동을 보장하는 그의 연기는 이번에도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켰고, 그가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뭉클함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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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평점 : 7.5점/10점
그는 정말 역사 속 패배자였을까? 역사의 패자 '단종'을 위한 따뜻한 위로, 그리고 미친 연기력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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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역사적 사실대로, 단종은 결국 16세의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권력 투쟁에서 철저하게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과연 그를 '실패한 왕'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세조는 권력을 쥐었지만 평생을 피 묻은 손에 대한 죄책감과 반정의 정당성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반면, 단종의 시신은 버려졌으나 엄흥도라는 일개 백성이 목숨을 걸고 거두었으며, 후대의 수많은 민초들은 오랫동안 단종을 가슴속에 성군으로 기억하고 기렸다.

​결국 정치적 권력 싸움에서는 실패했을지 모르나, 사람의 마음을 얻고 후대의 역사 속에 '절대적인 명분과 동정'으로 살아남은 이는 단종이었다. 비록 옥좌는 잃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그는 영원히 패배하지 않은 왕으로 남았던 것이다. 영화는 1457년 청령포에서 역사가 지우려 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단종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치열하고 의미 있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총평하자면, <왕과 사는 남자>는 뻔할 수 있는 역사적 비극을 인물들의 촘촘한 감정선과 따뜻한 연대로 엮어낸 훌륭한 영화다. 오락성과 작품성의 균형을 잘 잡았으며, 무엇보다 배우들의 명연기만으로도 극장에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개인적인 평점은 10점 만점에 7.5점. 명절 연휴 가족들과 함께 가슴 따뜻해지는 웰메이드 사극을 즐기고 싶다면 주저 없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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